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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여행기5 - 혁명 박물관 (Museo de La Revolucion) 본문

중남미/쿠바

쿠바여행기5 - 혁명 박물관 (Museo de La Revolucion)

soyoja 2014. 7. 10. 04:33

혁명 박물관은 쿠바 국립 미술관 바로 옆에 위치해 있다. 쿠바 혁명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곳으로 1920년 까지는 대통령 집무궁으로 사용되었고, 1959년 쿠바 대혁명 이후 박물관으로 개장되었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에 대한 자료가 많고 쿠바 혁명의 역사에 대해서 알기 쉽게 설명되어 있다. 사실 이 곳을 방문하기 전에는 쿠바 혁명에 대해서 별로 아는 바가 없어서 이 곳을 보던 당시의 감흥은 그냥 그랬는데. 뒤늦게 이 포스팅을 하기 위해서 쿠바 혁명과 이 곳 박물관에 대해서 찾아보니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박물관에 가보기 전에 사전에 이런 지식들을 가졌다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 는 말이 나오나보다. 여기서 잠시 쿠바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보자.

콜롬버스에 의해 1492년 발견된 쿠바는 스페인의 식민지로서 남미로가는 스페인의 관문이자 카리브해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러나 멕시코와 남미가 식민지로 개발되면서 점차 소외된다. 이후 아메리카 대륙의 독립운동이 활발해지며 1776년 미국 독립전쟁, 1804년 아이티를 시작으로 아메리카 각국이 독립해 나갈 때도 푸에르토 리코와 함께 최후까지 에스파냐 식민지로 남아 있었다. 1868년부터 78년까지 벌어진 독립전쟁으로 자치령임을 인정받았으나 처우는 나아진 게 없었고 결국 1895년에 2차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1898년, 제국주의에 뒤늦게 눈뜬 미국이 메인호 폭파사건을 기회로 쿠바 독립전쟁에 뛰어들어 사태는 미-스페인 전쟁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쿠바 독립당이 쿠바의 반 이상을 수복한 상황에서 스페인은 식민지를 유지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아 결국 쿠바는 미국의 통제 아래 들게 된다.

1902년 미국은 쿠바에게 제국주의적 야심이 없다(?)는 것을 과시할 요량으로 쿠바를 독립시켰으며, 그 대가로 1867년 알래스카를 살 때 그랬듯 싼값에 관타나모 인근의 땅을 사들여 미국의 군사기지로 삼았다. 이후 1959년까지 반세기 이상, 쿠바는 세계사의 변방으로 남은 채 미국의 충실한 설탕공급기지이자 경제적 식민지로 존재했으며,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20 세기 초. 독립한 직후 쿠바의 각료 회의 모습. 혁명 박물관 내에 전시된 모습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공산주의 및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가 급속도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쿠바에서도 점차 이러한 의식에 눈뜨게 된다. 특히 1933년에 이른바 중사의 반란으로 불리우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풀헨시오 바티스타(Fulgencio Batista) 군사정권의 무능과 부패, 폭정에 대한 저항의식은 더해만 갔다.

1952년, 변호사이던 피델 카스트로도 참여한 몬카다 병영 봉기(7월26일 사건: Movimiento 26 de Julio)은 바티스타의 권력 기반이던 군대 조차도 바티스타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비록 봉기는 실패로 끝났으나 카스트로는 재판정에서 당당한 태도로 자기의 정당함과 혁명의 당위성을 역설하여 쿠바 역사에 이름을 처음으로 남기게 된다.

바티스타는 카스트로를 그저 25살 애송이로만 보았는지 1년후 특사로 석방했고, 멕시코로 탈출한 카스트로는 그곳에서 많은 반 바티스타 동지들을 만난다. 맹우 체 게바라를 만나게 된 것도 이때였다.

 

요트 그란마(Granma,  "할머니" 라는 뜻) 를 타고 쿠바로 입성한 카스트로 일행의 경로를 보여주는 그림.

이들은 1955년 요트 할머니(Granma) 호를 타고 쿠바에 재입성한다. 상륙지점에서 바티스타 군대의 공격에 82명의 동지가 12명으로 줄어드는 역경 끝에 동부 산간에 거점을 마련하여 저항을 개시했다. 이 시기에 사실상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은 카스트로의 공산 게릴라군은 대민봉사활동을 하며 지역 거점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지역 주민들의 농사일을 도와주고, 글자도 가르쳐주고 하는 식이었다. 의학도이던 체 게바라는 의료 대민봉사활동을 주로 했고, 이게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대민봉사활동을 통해 확고한 지역 거점을 세운 공산 게릴라군은 산간 주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로 정부군에 매우 효율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피델 카스트로는 자신의 엄청난 연설 및 선동 능력을 발휘, 쿠바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호응을 받아 마침내 1959년 1월 바티스타 독재 정권을 추방하고 쿠바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쿠바 혁명'이다.

바티스타가 도주하고 혁명군이 아바나에 진입하던 당스의 모습을 그린 그림. 혁명박물관 내에 위치 

그림 속에는 "바티스타 도주하다! (Huye Bastista)" 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혁명박물관(Museo De La Revolucion)은 1953년 피델 카스트로가 미국의 어용정권이던 바티스타 정권을 습격하면서 시작된 쿠바 혁명을 기념하고, 혁명 이후 21세기 까지의 쿠바 근대사의 변화된 모습을 전시해 놓은 곳이다. 전시 자료는 주로 사진과 신문 기사들 위주였고 그 나마 업데이트가 잘 안되고 있는 오래된 자료라서 아쉽다. 그래도 혁명 박물관의 건물이 초대 쿠바 정권의 대통령 집무실이라는 점에서 이 곳 박물관을 방문해 보는 것 자체는 상당히 의미가 있다.

 전시관은 오전 9시 부터 오후 6시 까지 운영하며 입장료는 6 CUC 이다. 특이하게도 전시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으나 2 CUC 만 추가로 내면 사진을 촬영할 수 있게 해 준다. 

 

전시관에 들어가는 입구에는 시몬 볼리바르(좌)와 쿠바의 2차 독립전쟁을 이끈 영웅 호세 마르티(José Martí, 우) 의 흉상이 있다.

 천장에는 혁명을 상징하는, 천사가 쿠바의 깃발을 들고 하늘로 날아가는 모습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내부 일부 구역은 보수 공사 중이었다. 다른 남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보수 공사를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식이다.

 

대통령 집무 의자

혁명박물관 초입에 위치한 당시 대통령의 집무실, 각료 회의실을 거쳐 안쪽으로 들어가면 쿠바 혁명 당시의 자료들이 소장된 전시관이 나온다.

 전시관은 대부분이 사진과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신문 스크랩 위주로 전시가 되어 있으며 시대상을 보여 주는 물건들, 혁명 당시에 쓰였던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혁명 성공이후 카스트로가 주장한 20개의 개혁안 (Plan de 20 puntos) 에 대한 기사. 몇가지만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1. 농업지의 총제적 개혁

2. 관세 개혁

3. 산업화 (3개월 내에 5만 명의 신규 노동자 고용)

4. 주택 공급 계획

5. 지방의 요구사항에 우선적 대처

등등...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쿠바의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미국의 경제 재재는 효과를 발휘해서 고립된 채 소련의 원조에 의지하게 된다.

1960 년, 미국을 방문한 피델 카스트로. 미 의회에서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한다. "이 세상에서 무기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싸우는 인간의 윤리가 그 어떤 무기들 보다도 중요하다" (Las armas no son las cosas más importantes en el mundo. la moral de los hombres que pelean por los ideales es mucho más importante que todas las armas")

쿠바 혁명이 성공한 직후, 미국은 쿠바 사회주의를 전복시키기 위한 여러 공작을 꾸몄는데  그 중 하나가 피그스 만 침공(La Batalla de Giron) 으로 1961년 4월 미국이 훈련시킨 1400 명의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 남부를 공격한 사건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은밀하게 훈련된 명망자들은 카스트로의 체제 전복을 꾀하며 쿠바로 상륙했다.  

피그스만 침공도. 1960년 4월

 

그러나 이들 침략군은 쿠바 정규군에게 사흘만에 격퇴되고, 100 여명의 사상자와 1천여명이 생포되는 패배를 맛보았다. 카스트로 정부는 1961년 12월 이들의 몸값으로 5300 만 달러를 받은 후 사로잡은 1113명을 풀어줬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의 위신은 크게 떨어졌고 강대국 미국에 맞서는 쿠바의 사회주의 세계에서의 위상은 매우 높아졌다. 그리고 쿠바의 사회주의 체제는 더욱 공고해진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인 1962년에는 소련이 미국을 견제하고자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는 시도를 하게 되지만,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강력한 위협에 굴복하여 소련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1965년의 쿠바 내각의 모습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최고권력자인 서기장을 맡았다.

쿠바는 대단한 스포츠 강국이기도 하다. 아마야구 최강자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배구, 육상, 복싱 등 다양한 종목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사진은 쿠바 최초의 올림픽 메달(은메달)을 따던 장면으로 1964년 도쿄 올림픽 남자 100m 결승전의 모습이다.

 

쿠바의 스포츠 분야를 설명하는 전시관에서는 특이하게도 카스트로가 시타를 치던 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야구선수 출신으로 대학생 시절에는 대학팀 대표로 미국을 방문해서 메이저리그 팀에 입단하고자 뉴욕 양키스와 워싱턴 새니터스의 트라이아웃에 참가했으나 입단에 실패했다고 한다. 야구광이라서 야구에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어서 쿠바 국내 리그와 야구선수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쿠바 야구는 바로 카스트로의 후원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 후 쿠바 의료시설이 향상되는 것을 보여주는 그래프. 아래 그림은 병상 숫자의 변화이다. 1958년 28,536 개이던 병상 숫자는 1990년 63,205 개로 늘어난다. 하지만 32 년 이란 시간을 생각해 보면 그 증가폭은 그다지 크지 않다. 세계 정상급을 자랑하던 쿠바 의료 기술은 소련의 원조가 끊기고 약품과 의료기기의 만성적인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쿠바의 앞선 의료 기술을 소재로 한 영화도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 쿠바에서 얼굴을 완전히 바꾸는 유전자 치료를 받는다는 설정의 "007 : 다이 어나더 데이" 가 유명하다.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우정. 체 게 바라는 쿠바의 2인자로 순회대사, 중앙은행장, 산업부 장관을 역임했다. 하지만 피델과의 정치적 견해 차이로 결국 호의호식 할 수 있던 쿠바를 떠나 아프리카 콩고, 남미 볼리비아로 갔다 ,그리고 볼리비아에서 체포되어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체는 피델의 맹우로 혁명의 성공을 이끈 동지였지만 그들의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피델의 통치술은 체와 피델간의 관계를 우정과 혁명의 드라마로 각색하여 쿠바 혁명 성공을 홍보하는데 이용했다. 쿠바에서 볼 수 있던 많은 자료들에서 체와 피델의 우정을 나타내는 그림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쿠바혁명 게릴라 전을 이끈 영웅, 카밀로 세인푸에고스(Carmilo Cienfuegos, 왼쪽)와 체 게바라(Ernesto Che Guevara, 오른쪽) 의 밀랍인형. 체는 그의 상징인 검은색 베레모와 크리스토발(Cristobal) 카빈 경기관총, 시엔푸에고스의 중절모와 M-1 카빈을 들고 있다. 이들 무기들과 옷은 혁명 박물관 내에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쿠바에서 체 게바라는 혁명의 아이콘이자 영웅의 이미지로 형상화 되어, 수 많은 관광 상품에서 사용되고 있다. 쿠바 관광 가이드는 말하기를 "체는 모든 세대에게 존경받으며, 체가 없는 관광 상품은 없다" 고 말한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젊은 나이가 죽은 그의 일생, 의학도와 쿠바의 2인자로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혁명 투사로 살았던 그의 삶. 거기에 잘생긴 외모까지... 여러모로 그의 이미지는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듯 하다.

 전시관 바깥쪽에 진열된 이 그림은 꽤나 인상적이다. 미국이라는 모양의 창살 속에 갖힌 비둘기를 그려놓고, 미국이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라고 선동하는 그림이다. 

혁명 박물관을 나오는데 마지막 출입구 근처에는 바보들의 코너(Rincon De Los Cretinos) 라는 벽화가 있었다. 여기에는 바티스타 전 쿠바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아버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아들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모습이 희화화되어 그려져 있고 각각의 인물 옆에는 아래와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사진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바티스타 - 로날드 레이건 - 아들 부시 - 아버지 부시

To 바티스타 : 우리의 혁명을 성공하게 해준 바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오.

To 레이건 : 우리의 혁명을 더욱 강하게 해 준 바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오.

To 아버지 부시 : 우리의 혁명을 더욱 공고하게 해 준 바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오.

To  아들 부시 : 우리의 혁명을 돌이킬 수 없게 도와준 바보, 당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오.

가이드는 이 그림들을 가르쳐 "반미의 오기를 표출한 것" 이라 했다. 하지만 쿠바의 어려운 경제 상황과 미국의 자금력에 굴복하는 쿠바의 현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런 카툰은 공허함만 남긴다. 경제 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연간 쿠바에 입국하는 미국 관광객은 약 40만명으로 추산되며, 많은 쿠바인들이 이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으로 생계를 연명한다.

혁명 박물관을 나가는 길에 걸린 대형 쿠바 국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