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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 박물관 1편 본문

국내/경상도

경주 국립 박물관 1편

soyoja 2014. 4. 21. 03:00

주말을 이용해서 경주 국립 박물관에 다녀왔다. 2 시간이 채 안되는 짧은 방문이었지만, 상당히 흥미로운 곳이었다.

입장료 : 무료

관람시간 : 오전 9시 ~ 오후 6시 (토요일, 공휴일은 1시간 연장)

 

 

경주박물관의 메인 전시관이라 할 수 있는 고고관의 모습이다. 2층 규모로 꽤 고풍스럽게 지어져 있는데, 지붕은 석가탑의 상부 모습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입구에 들어가서 박물관 건물에 들어서기 전, 거대한 종이 보인다. 바로 "에밀레 종" 으로 유명한 성덕대왕 신종이다. (국보 29호) 원래 봉덕사에 있었던 것을 보존을 위해 경주 시민들의 모금운동을 통해 운반비용을 마련해서 이 곳 경주박물관으로 옮기게 되었다고. 종에 새겨진 저 아름다운 문양은 교과서 등에서 자주 보던 것으로 직접 보니 상당히 정교하면서도 아름답게 만들어진 양각임을 알 수 있다.

이제는 보존을 위해 치지 않고 당목도 치워 버렸으며, 종도 울리통이 아닌 받침목 위에 세워져 있어서 더이상 칠 수 없는 종이 되어 버렸다. 종의 보존을 위해서라지만 종으로서의 수명은 끝나 버린 것이다. 이 곳에서는 녹음된 종소리를 정기적으로 틀어주고 있었다. 이 종 주변은 항상 관람객들로 붐빈다.

아래 전시품의 유물 설명들은 박물관 내부의 전시관에 적혀 있는 내용들을 참고로 했다.

 

경주박물관은 바로 "신라 박물관" 라고 할 수 있다. 경주란 도시 자체가 신라의 수도로 영화를 누리던 곳이었으니...

 

신라 역사관은 총 4개의 실로 구성되어 신라의 건국부터 최 전성기의 화려한 유물들,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시간 순으로 전시관이 구성되어 있었다.

연대기 순서대로 4개의 실은 각각 제 1실이 "신라의 건국과 성장", 제 2실은 "황금의 나라 신라", 

제 3실은 "강력한 중앙집권 왕국", 제 4실은 "신라의 융성과 멸망" 으로, 연대기 순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신라의 건국과 성장을 보여주는 제 1관에는 신라 형성 초기의 유물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성산동 무덤에서 출토된 초기 토기들

대구 문산리 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들.

신라의 토기는 밀폐된 굴가마에서 1,000 도가 넘는 고온으로 구워내 매우 단단한 회청색의 토기라 한다. 

이 토기들에 작은 인형이나 동물인 토우를 붙여 장식한 것이 많은데 이런 양식은 신라에서 널리 쓰였다.

3세기 경에 사용된 옥 목걸이. 위서 동이전에 의하면 삼한 사람들은 옥을 재화와 보물로 삼아 이를 옷에 장식하거나 목이나 귀에 걸었다는기록이 있다. 이 유물들은 이런 기록을 뒷받침 하는 것으로 당시 신라 사람들은 화려한 장신구를 즐겨 착용했음을 짐작케 한다.

 말 머리 가리개. 5세기의 물건으로 경주 사라리에서 출토되었다.

 

"황금의 나라 신라" 라는 제목의 제 2실에는 화려한 금으로 된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어서 눈을 무척이나 즐겁게 해 준다.

8 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가르쳐 "눈부신 금과 은, 채색이 많은 나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金)은 신라가 고대 국가로 성장하던 마립간 시기(4 ~ 6세기) 에 집중적으로 사용되었다. 마립간은 왕을 지칭하는 신라어로, 왕은 금관과 금 허리띠를 차고 금귀걸이, 금팔찌, 금반지를 끼었다. 4세기 중후반 무렵의 경주 월설로가 13호 무덤에서 금으로 만든 목걸이, 귀걸이와 그릇이 나온 것으로 보아 신라인들은 최소한 4세기 초부터는 금을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이 허리띠는 국호 88호 이다. 왕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금관총의 관에서는 다수의 황금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당시에 왕이 이렇게 화려한 금 장신구들을 착용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금관 역시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이다. 국보 87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라의 금관은 지금까지 총 6 점이 발굴 또는 발견되었다. 이들 6점의 금관들은 아래와 같다.

1921년 금관총

1924년 금령총

1926년 서봉총

1973년 천마총

1974년 황남대총

1972년 경주 교동에서 작은 금관이 도굴로 인해 발견

 

황남대총 남분 목관 내에서 발굴된 왕의 소장품들.

이곳에서는 국보 194호로 지정된 금 목걸이를 비롯해서 금 허리띠, 금 드리개, 금관 파편 등이 발굴되었다.

 

8세기에 편찬된 일본의 역사서인 일본서기에서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의 나라" 로 기록하였다. 966년 아랍의 지리학자 알 마크디시(Al Maqdisi)는  신라에 대해 "집을 비단과 금실로 수놓은 천으로 단장한다. 밥을 먹을 때도 금으로 만든 그릇을 사용한다" 라고 적었다. 신라의 황금 문화는 5세기 부터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 간이 전성기로, 왕과 귀족들이 금관을 비롯해 금으로 된 장신구를 많이 사용하였다.

"황금의 나라 신라" 관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천마총에서 출토된 금관이다(보물 339호) 천마총은 확인되지 않은 어느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무덤의 부장품을 넣어둔 퀘에 그려진 흰 말을 기념하여 천마총으로 명명되었다. 참고로 총(塚) 은 확인되지 않은 왕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며 릉(陵) 은 확인이 된 왕의 무덤을 일컫는 말이다. 학계에서는 천마총을 지증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금으로 된 금 가락지. 황금 제품들은 신라 지배층들의 신분을 과시하고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

이 그릇들은 경주 황남동 등에서 발굴된 것으로 5-6 세기의 것이다.

신라에서는 금그릇을 쓸 정도로 많은 양의 황금을 사용하였는데, 그 당시 한반도에 이만한 양의 황금이 있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에 쌓여 있기에, 신라인들이 사용한 황금의 출처는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이들 금그릇과 은그릇은 왕과 왕족의무덤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이 그릇들은 얇은 금판이나 은판을 그릇 틀에 대고 안팎으로 두드려서 만든 후 입술 부분의 가장자리를 밖으로 말아 붙였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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